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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다한 상식/지식

애블린 패러독스 (싫을텐데 아무도 말 안하는 상황.)

 애블린 패러독스라는 용어를 소개하면서 시작해 볼까 합니다. 미국 조지워싱턴 대학의 제리 하비 교수가 어느날 가족 모임을 하게 되었습니다. 40도가 넘는 폭염에 다들 힘겨워 하고 있을 때 가족 중 누군가 2시간 가량 떨어진 애블린이란 도시에 가서 점심을 먹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다들 속으로는 내키지 않았지만 반대하기도 그래서 따라 나서게 되었는데 결국 극심한 도로 정체와 날씨 때문에 매우 힘든 경험을 하고 오게 되지요. 도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처음 애블린에 가자고 했던 사람도 사실 가기 싫으면서도 예의상 의견을 내봤을 뿐인데 다른 의견들이 없다보니 고생길을 자초하게 된 것이었습니다. 이런 경험을 토대로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이지만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 그냥 하게 되는 것을 애블린 패러독스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애블린 패러독스는 일상생활 속에서도 종종 나타납니다. 회식자리에서 모두들 1차만 하고 일찍 집에 갔으면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어도 누군가 의례적으로 “2차 가야지”하고 얘기하면 마지못해 발걸음을 옮기게 됩니다. 정작 그 야이기를 한 사람도 다음 날 아침에 자기는 사실 2차까지 하기는 싫었다고 얘기할 때 보면 도대체 누구를 위한 2차 술자리였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요. 업무계획을 정할 때에도 분명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회의에 참석한 사람들 중 강력하게 의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으면 그 내용대로 결정이 날 때가 있습니다. 일을 진행하는 도중에야 그때 계획을 잘못 짰다는 걸 확인하게 되지만 이미 시간이 한참 지난 뒤인지라 되돌리기도 어렵습니다. 가장 안좋은 것은 일이 잘못될 것을 짐작했으면서도 조용히 하고 있다가 좋지 못한 결과가 나온 뒤에야 “그럴 줄 알았다”고 비아냥 거리는 사람들입니다. 

 과거 우리나라 사회에서는 윗사람의 의견을 따르고 반박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젊은 사람이 여러 사람 모인 곳에서 자기 의사를 분명히 하면 ‘당돌하다’는 평가를 받고는 했지요. 요즘은 시대가 많이 바뀌어서 토론문화가 발달하고 비록 반대되는 의견이라도 자기 생각을 확실하게 표현하는 것을 권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특정한 사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기 의사를 표현하는데 미숙한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경우보다 훨씬 많은 것이 사실입니다. 성격상 어쩔 수 없는 사람도 있고, 괜히 상사의 미움을 사지는 않을까 걱정하는 마음에 그럴 수도 있습니다. 가장 좋지 않은 경우는 자기 의견에 자신이 없어 괜히 나중에 자기 말대로 했다가 잘못되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입니다. 따라서 어떤 자리에서건 자기 의견을 말할 수 있으려면 평소에 해당 분야에 대해 많은 연구와 고민을 하고 있어야 합니다. 확실한 소견 없이 의무감에 내놓는 의견은 논의의 본질을 흐리고 많은 시간을 낭비하게 할 수 있으니까요. 

 듣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남의 말을 잘 듣고 자유롭게 의견을 이야기할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사라고 해서 처음부터 회의를 주도하는 것보다 우선 자연스럽게 다양한 의견들이 나올 수 있도록 하고 마지막에 의견들을 종합해 책임감을 갖고 결정을 내리는 것이 좋은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사소한 의견이라도 무시해도 되는 것은 없습니다. 서로가 활발히 토론하고 서로를 이해시키는 와중에 어렵던 문제도 실마리를 찾게 된다는 걸 유념했으면 합니다.


 대화가 사라진 사무실 풍경은 그 적막함은 둘째 치고 성과면에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직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누구나 진중한 고민 속에 의견을 만들고 이를 서로 허심탄회하게 나눔으로써 가장 바람직한 방법을 만들어 나가는 분위기가 사내에 정착되었으면 합니다. 설사 내 생각과 다른 의견이 있더라도 무시하지 말고 서로 토론을 통해 최선이 무엇인지를 함께 연구해 보도록 합시다. 진정한 커뮤니케이션은 이처럼 양쪽이 서로를 향해 한 발씩 더 다가갈 때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